‘구부러진 길, 저쪽’
- <내 편 들어줘 고마워요> #한일수, #유리창, @우일문
...(양배추를) 아무리 벗겨보아도 끝내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일견 무의미하게 그려진 섬유질의 무늬 외에는 아무런 알맹이를 찾을 수 없다. 살아가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 난해함과 엄청난 단순함... (‘구부러진 길, 저쪽’, 오정희)
책을 읽는 내내 오정희의 저 소설이 떠올라 뒤적거렸더니 아마도 저 대목이 어렴풋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 보다는 소설의 제목이 <내 편 들어줘 고마워요>의 행로를 닮아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겁거나 사람의 우울한 그늘에 기대고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의사의 자분자분한 조언을 듣는 환자의 입장이라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결코 가벼울 수는 없겠습니다.
아내는 제가 낙천적이라고 늘 말합니다. 칭찬일 때도 있고, 조소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됩니다. 아내의 말과 달리 저는 늘 낙관과 비관의 양극을 오락가락합니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용에 다다라서 평안한 삶을 이어가면 좋겠으나 아무나 되는 일은 분명 아닙니다.
글쓴이는 환자들의 낙관과 비관 사이에 악마처럼 숨어있는 까다로움과 예민함, 그것을 추동하는 무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사실 책 제목과는 좀 다르게 ‘네 편들게 해줘’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저는 읽는 내내 한 의사가 환자 또는 건강이 위태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포르포즈, 연애편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리창 출판사에서 기획하는 책들이 대개 그렇듯 부드러워 찔리는 줄도 모르는 가시가 있어, 읽고 나서도 되새김하게 되는 매력도 물씬 배어있습니다.
농사꾼인 저는 초보 시절 고수들에게 많이 물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가장 못 된 전문가는 단순명쾌한 처방을 내립니다. 우리 밭의 처지와 형편, 필요와 무관하게 내려진 처방은 처방이 아니라 사기입니다. 진정한 전문가는 학식으로 말하지 않고, 문제해결의 실마리에 집중합니다. 은연중 빠져들게 되는 만병통치와 자기만족의 미망을 폭로함으로써 ‘구부러진 길, 저쪽’으로 인도합니다. 한의사, #한일수 는 바로 그렇게 ‘저쪽’으로 함께 가지고 자분자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