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국밥 집에서 아내와 함께 불안한 술자리를 가졌다. 채 한 잔도 마시기 전에 주인아주머니의 모친이 병환이라 곧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천하에 맥 빠지는 일이 시간 정해놓고 술 마시기다. 그렇다고 싸들고 집으로 돌아가서 판을 이어가는 것은 이날 술자리의 취지뿐 아니라 기본적 주도에 벗어나는 일이다. 유일한 방편은 속도전이다. 이도 나름 장점이 있다. 취하는 속도가 마시는 속력에 비례하므로, 기분이 좋아지는 데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그러나 취상(?)을 음미할 시간이 취하는 속도에 반비례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 해도 현실은 현실에 맞설 때에만 현실 아니겠는가. 회피하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 괴물, 또는 유령일 뿐이다. 그게 취하자고 마시고, 노는 술자리라 하더라도.
“어, 주인장. 우리는 옆 손님들 일어설 때 일어나면 되겠네.” 소주잔에 정량을 잴 겨를도 없이 맥주잔에 대충 소주를 넣고, 그 위를 맥주로 덮는데 옆자리 아저씨가 이렇게 선수를 친다. 바쁜 마음에 “앗, 우린 그 반대인데요.”라고 대답하고 보니 촌스럽다. 다행이다. 나도 촌사람이 다된 모양이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가끔이지만 불쑥 튀어나오는 촌티에 은근히 뿌듯하다. 도시 사람이 촌스러운 것은 사회생활에 심대한 결격사유가 되겠으나, 촌으로 이주해 사는 도시인이 부지불식간 얻게 되는 촌티는 가히 축복이다. 쉽지 않다는 말이다. 진작 귀농귀촌을 했으면서도 도시인의 성정을 머리에 이고 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반도반촌의 박쥐조차도 못되고 무국적의 난민과도 같은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자가 발전하는 사람들 말이다.
얘기가 엇나갔다. 옆자리 그 아저씨가 그의 일행과 나누던 말의 한 자락이 또 들려왔다. “이거, 뭐가 잘못됐어. 잘못되었다니까.” 몇 마디 들린 다른 토막말들을 주어모아 억측을 해보면, 그의 말의 요지는 이랬다. ‘정년을 맞고 보니 지난 세월이 모조리 신기루가 되고 말았다. 공허하다. 잘 못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 소슬바람이 옷소매를 스칠 때 문득 다가서는 겨울의 기억마냥 낭패감이 묻은 고백으로 들렸다.
속전속결로 술을 마시는 와중이라 그랬는지, 그 아저씨의 한숨에서 나는 소설가 유현종의 ‘거인’(1966)이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케케묵은 나의 독서추억에 몇 안 남은 글 중의 하나이다. 나는 아직도 그 소설에 등장하는 짧은 외침을 기억한다. “나는 기관사요, 기관사요!” 스패어, 또는 땜빵으로 일당 기관사로 운전하던, (정리해고로)진작 해직된 기관사가 터널 사고가 나자 열차 위를 내달으며 승객을 대피시키며 외치던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970년대 또는 1980년대에서조차 “나는 기관사요, 기관사요!”에 결부할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지 않았다. 직업의식과 자기 정체성이 융, 복합된(?) 자존심을 본 적이 없다. 많은 이들이 직업을 역할로 받아들이고, 직장생활을 일종의 연기로 받아들이는, 그래서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 여길 뿐 제 직업을 무기로 세상을 관통하는 자의식을 강고히 하지 못하였다. 지금이야 우리는 ‘나는 가수다.’라는 말로 어떤 정체성과 자부심,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결기 등을 목도한다. 그러나 초라하다. 경쟁과 비교우위를 정하는 룰 위에서만 ‘나는 뭐’라고 선언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처럼 오해하는 자기 정체성일 뿐이다. 임금피크제와 그와 관련된 노동정책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도망친 세월호 선장과 선원의 행태를 그 사람만의 개인적인 특성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장면이다. 배우 마동석이 나쁜 놈을 막아서며 하는 말이, “나 저기 아트박스 사장인데.”다.
“그러니 쫄지 말자. 나쁜 놈이 있으면, 그놈이 재벌 2세든 권력자의 자녀든 쫄지 말고 막아서자. 네가 뭔데 나를 막느냐고 묻거든 당당하게 답하자. 아트박스 주인이라고. 분식집 아줌마라고. 642번 버스 기사라고.”
인용한 글은 ‘베테랑’에 대한 어떤 이의 감상 한 자락이다. 정의로운 시민들이 사회악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겠다. 자기 정체성을 걸고 쫄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소설가 최인훈은 ‘거인’을 두고 ‘이 소설에는 근육이 있다’라고 표현했다. 이 근육은 시민의식이나 사회에 대한 성찰을 재료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직업과 그에 따르는 노동으로부터 생겨난다. 대단히 사적이며 개인적인 시공간에서 형성되는 것이 직업의식, 근육인 것이다. 그러한 근육들이 서로 다른, 또는 같은 세계관을 놓고 다중의 팔씨름을 벌이는 곳이 사회고 국가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떠한 연대든, 투쟁이든 자신의 근육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면 맥없이 스러지고 말 것이다.
우리 부부가 농사를 지어오면서 가장 놀라는 것은 풀이 가지는 개체성이다. 모든 풀들이 필연적으로 저마다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주어지는 환경과 조건에 적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발아시기마저 스스로 늦추거나 서두는 고도의 전략까지 구사한다. 이러한 개체성이야말로 직업의식의 미덕이라고 나는 믿는다. 직업을 가진 이들뿐 아니라 실업청년과 은퇴자 또한 저마다의 헬스클럽에서 그에 걸맞다고 판단하거나 합당하다고 믿는 근육을 키웠으면 좋겠다.
옆자리의 아저씨가 먼저 일어서면서, “내가 진건가?”라며 웃는다. “엇, 저는 한 잔 남았네요.” 절로 나오는 나의 이 비겁한 대답이 또한 즐겁다. “사실은 말이야, 저 인간들 엉덩이가 무거워서 그랬어. 천천히 마셔요, 한 십 분쯤 더.” 순대국밥집 사장 아주머니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던가?